' Busan the Liberation Hall 민주공원 부산광복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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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Travel/부산 Busan

Busan the Liberation Hall 민주공원 부산광복기념관

by 행복한선비 2022.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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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광복기념관은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이후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일본의 침략성과 그에 항거한 부산지역 항일 독립 투쟁의 역사적 유물을 전시함으로써, 우리 선인들의 숭고한 민족정신과 광복활동을 길이 선양 전승하고 아울러 자라나는 후손들의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하기 위하여, 시민의 뜻을 모아 2000년 8월 15일에 개관하였다.
2층 전시실에는 부산 독립운동의 역사를 비롯하여 다양한 부산지방의 항일 독립 운동의 실상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Busan Independence Hall shows acts of invasion committed by JAPAN and displays historic relics of anti - Japanese
struggles waged by Busan citizens from the opening of the Busan port in 1876 to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on August 15, 1945. Opened with the help of Busan citizens on August 15, 2000, this hall aims to uphold and hand down our ancestors lofty spirit manifested in their struggles against Japan and help future generations have a new vision for the nation. The exhibition room on the second floor displays a variety of materials and data including a brief history of Busan's independent movements to help visitors understand the actual circumstances of Busan ' anti - Japanese fight.


  • 광복 기념관 관람안내 visitor information
  • 입장료: 무료 FREE
  • 관람시간: 화요일~ 일요일 (Tuesday to Sunday) Opening Hour: 09:00~ 18:00
  • 휴관일 Closing : 매주 월요일, 매년 1월 1일 New year's Day , every Monday , Public holiday .



입구에 들어서면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바로 볼 수 있다. 그 중 가슴에 와닿았던 분들이 두 분이 계신데
박재혁, 안희재 독립운동가이다. 백산 안희재 선생님은 민족자본가 중 하나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백상상회 자금으로 신문사를 인수하였고, 경주 최부자댁의 최부자로 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받아 당시 독립운동 본거지인 만주로 독립운동자금을 안전하게 보내었다고 한다. 경주 최부자댁은 경주에서 제일 부자로서 자손대대로 독립운동을 한 가문이다.

Entering the entrance, you can see the independence activists who worked in Busan right away. Two of them touched my heart. Park Jae-hyuk and Ahn Hee-je are independence activists.
Ahn Hee-jae is one of the nation's capitalists, and to raise fund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Baeksan Chamber of Commerce] It was established. [Baeksan Chamber of Commerce]
It acquired a newspaper company with funds from the Baeksang Chamber of Commerce and received fund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from the richest man in Gyeongju and safely sent fund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to Manchuria.

[Gyochon Hanok]경주여행  아이와 갈만한 곳  데이트하기 좋은 경주교촌마을 향교, 최부자댁

경주여행 필수코스 월정교를 건너면 교촌마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촌마을안에 경주향교, 신라시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화 최부자댁이 있습니다. If you cross Woljeonggyo Bridge, an essential cours

ohmygodnews.tistory.com


감동적이었던 일화가 있는데 최부자댁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금액과 안희재 선생님이 자금을 운반하여 만주에 도착했을때의 금액이 일치했다고 한다. 경주에서 만주까지 많은 운반책들이 본인의 자비를 털어서 독립운동자금을 고스란히 보낸 것이다.

There is a touching story, it is said that the amount of money sent from the rich man Choi's house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was the same when Ahn Hee-jae delivered the funds and arrived in Manchuria. Many carriers from Gyeongju to Manchuria used their own money and sent fund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intact.

"조국독립을 위해 청춘의 일편단심을 합한다"

당시 20대였던 박재열 선생님은 부산의 윤봉길 같은 존재로서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 폭탄에 의해
당시 부산경찰서 일본인 경찰서장의 죽음은 독립운동가들의 사기를 올려 더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박재열 선생님은 완벽히 위장하기 위해 한국에서 대마도.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한국으로 중국상인으로 입국하여
당시 고대 문서를 좋아했던 일본인 경찰서장에게 접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Park Jae-yeol, who was in his 20s at the time, threw a bomb at the Busan Police Station as Yoon Bong-gil in Busan.
At that time, the death of a Japanese police chief at the Busan Police Station raised the morale of independence activists and led to a more active independence movement.
Park Jae-yeol went to Daemado Island in Korea to disguise himself completely. went to Japan and entered Korea as a Chinese merchant.

  • 개항후 부산인의 저항 Busan People's Resistance After Opening the Port


1876년 일제의 부산의 개항을 시작으로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침략에 대해 부산인들은 힘찬 저항으로 맞섰다. 1876년 4월 일본군함이 동래부에 들어와 탐색하려 하자 남문 일대에 모여든 민중들은 기왓장과 돌을 던지며 투석전을 벌였다. 이 사건은 개항 후 동래에서 일어난 최초의 민중적 반일 투쟁이었다.
부산인들은 1884년 10월 쌀판매 거절사건, 1886년 6월 선창가 투쟁사건 등 끊임없는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급기야 1886년 9월에는 일본 감수소 여인 납치사건에 집단적으로 저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저항사건은 모두 개항과 일본 전관 거류지 설치를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의 항일감정이 폭발한 것으로 이러한 사상적 기반을 통하여 부산의 독립운동은 활발히 전개 되었다
.

Starting with the opening of Busan in 1876, the Japanese Empire secured a bridgehead for the continental expansion. However, the Busan people responded with strong resistance to the Japanese invasion. In April 1876, when the Japanese warship entered Dongnaebu and tried to explore, the people gathered around the south gate threw tiles and stones and engaged in a dialysis battle. This incident was the first popular anti-Japanese struggle in Dongnae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The Busan people continued anti-Japanese movements, including the rejection of rice sales in October 1884 and the struggle against the dock in June 1886, and in September 1886, they collectively resisted the kidnapping of a Japanese prison woman. All of these series of resistance events exploded the anti-Japanese sentiment of local residents who opposed the opening of the port and the establishment of Japanese former residence, and Busan's independence movement was actively developed through this ideological basis.

  • 부산의 3.1 독립운동 3.1 Independence Movement in Busan


부산지역의 3.1 독립운동은 학생층과 부르주아 층의 주도로 노동자, 상인 등 광범위한 계층의 참여하에 이루어졌다.
부산의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원과 시위 횟수는 전국에서 경기도와 황해도 다음으로 높았으며, 사상자와 관공서 파괴등이 가장 많았던 것은 근대 이후 일제의 침탈이 가장 극심했던 관계로 항일 정신이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우리의 주권을 빼앗긴 역사적 배경속에서 교육받고 자란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부산의 항일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일신여학교 어린 소녀들의 항쟁은 부산 , 경남 3.1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독립운동 그 의의가 높다고 하겠다.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in Busan was led by the students and bourgeoisie, with the participation of a wide range of classes, including workers and merchants.
Busan's 3. 1 Independence Movement was the second highest after Gyeonggi-do and Hwanghae-do in the country

  • 부산항일학생운동 (노다이사건) Busan Anti-Japanese Student Movement


부산항일학생운동은 1940년 11월 23일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일본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민족 차별적 심판을 한데 대한 불만이 계가가 된 사건이었다. 
11월 21, 22일에 열린 모의 야영전투훈련 기간 중 심판장이었던 노다이는 조선인 학생에게 일부러 고된 산지를 우회시키고, 일본인 학생은 평지에서 전투훈련을 시키는 등 편파적 훈련을 진행하였다. 또한 11월 23일 경남학도 전력 증강경기대회에서는 전년도 1회 우승교인 동래중학을 제치고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제일 먼저 입장시켰으며, 동래중학이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면 트집을 잡아 재 시합을 시키거나 반칙이라고 떼를 쓰는 등 악랄한 수법으로 성적을 부진하게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차별에 두 학교 학생들은 울분과 의분을 참지 못하여, 폐회식 마지막 식순인 일본 국기 하강식 떄 일본 국가 대신 우리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노다이죽여라" "왜 놈 죽여라"고 절규 하였다.
1000여명의 양 교생들은 시위행진을 벌이고 4, 5학년을 중심으로 약 400명의 학생들은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여 외등과 유리창문을 모조리 깨어버렸다. 노다이 사건은 불과 1일간의 항일 투쟁이었으나 엄중한 일제의 보도 통제속에서도 우리 학생들의 민족정기는 전국에 널리 메아리쳐 갔다. 

  • 대한독립선언서 Declaration of Independence

부산에서 독립운동을 하신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모시고 있었다. 비어 있는 곳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분들의 자리이고 훗 날 이곳에 위패를 모신다고 한다. 부산에 살고있는 후손으로서 부산에서 독립운동하시고 순직하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The memorial tablets of those who campaigned for independence in Busan were enshrined. The empty places are the seat of those who have not yet died, and it is said that the memorial tablet is enshrined here in the future.
As a descendant living in Busan, I am grateful to those who died after independence movement in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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